운수 좋은 날.

끄적끄적 2005/08/24 23:23
"아홉시는 되야지 일 할 수 있겠구만."
"ㆍㆍㆍㆍㆍ."

춘식은 생각했다.

'낮부터 재수가 없더니만 이런데서 발목 잡히네. 지금이 여섯신데 세시간을 어떻게 기다리란 말인가. 하지만 안 하고 넘어갈수도 없는 일이고.'

"퇴근 시간 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니 섭섭하게 생각치 마시오."

춘식에게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기다렸다가 하는 수 밖에. 차안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멍하니 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원하지 않는 게식에 쓸데없이 낮의 일이 떠올랐다.


"오늘은 일진이 안좋다니까. 뒤통수에 매직(주1)을 얻어맞지 않나 다른 놈들은 이리 저리 빠져서 도와주지도 않잖여."

"아니 초장부터 김빠지는 소리하고 있어. 그깐 일들이 뭐 대순감."

"그러지 말고 잘 생각혀봐. 머리는 안아프고. 매일 일만 하는디 쉴땐 쉬어야지. 오늘은 비도 온댔응께 가지 말고 쉬어."

"아니 이 맑은 하늘에 뭔 비당가. 됐응께 나갈라요."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지만 일은 그닥 어려움 없이 쉽게 끝났다. 아니 힘들었지만 기다리는 시간도 일당으로 쳐 준다고해서 춘식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한 두푼도 아니고 자빠져서 쉬는데도 돈을 받으니 아니 좋을소냐.

열한시. 평소때보다는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낮에 가지말라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더욱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었다.

배도 고프고 해서 평소에 먹지도 않던 떡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비오는데 뭔놈의 떡이여 떡은.'

춘식은 홀로 중얼거리며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바람마저 몰아쳤다.

우산사이로 스며드는 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칠게 방문을 열어 제꼈다.

"야. 떡이다. 먹고 자!"
"ㆍㆍㆍㆍㆍ."

그렇다.







주1)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 길이는 손가락만하고 두께는 동전만한 끄적댈 수 있는 필기구의 하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비도 오고 일도 안되고 뒤통수는 얻어 맞아서 얼얼거려 기다리는 동안 요런 생각만 들더라.
다음엔 'B사감과 러브레터'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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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엔 2005/08/25 15:39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아, 처절해, 처절해!
    느껴진다, 너의 처절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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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VE + DOOMSDAY BOOK + OASIS

끄적끄적 2005/08/14 12:51
8월 초에 3박 4일간의 짧은 휴가가 있었다.

군바리이긴 하나 주기적인 휴가가 있는게 아니라 일반 회사원과 같이 여름휴가만 있는 관계로, 명절을 제외하면 수 일간 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여름휴가가 되겠다.

하지만 그래봐야 남들같이 거창하게 바다로 놀러간다던가 계곡을 찾아 들어가는 수고는 그리 달갑지 않은 편이라서 이번 휴가 때도 역시 집으로 가게 됬다.

산으로 바다로 떠난 사람들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방콕을 즐기는 나에게는 휴가 기간 동안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는 세찬 비가 더욱 더 휴면 휴가에 힘을 실어 줬다.

컴퓨터도 없고 티비에서도 그리 재밌어 보이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뒹굴 거리던 중(플스 들고 내려가는 건데) 사놓고도 보지 않았던 책이나 보자는 몹시 건전한 시추에이션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닌가.

틈만 나면 책을 사는 데다 요즘엔 헌책방까지 애용하는 관계로 장서라고 부르기는 뭣하고 책갑 몇 덩이 정도는 되는 책들이 불어나고 있던 터라 쌓아놓고도 보지 않는다면 책이 내게 아쉬운 생각을 품을 것 같기도 해서 냉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적지 않은 책들이지만 그 중에서 어떤 것을 읽을까 하는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책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툭하니 불거저나와 정갈한 하드커버를 자랑하는 한 권의 책이 바로 눈에 띄었다.

둠즈데이북. 코니 윌리스의 신작은 아니고 몇 년 전 나왔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이하 개말마)'와 같이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하긴 여기가 어디라고 SF 신작이 즉각 번역되어 나오겠는가.

비도 오기도 하고 위에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실은 나갈 데도 없는 처지라는 게 객관적이고 적절한 표현이기에, 둠즈데이라는 데서 울려 퍼지는 우울한 느낌과 현재 상황이 저절로 책장에 손이 가게 만들었다.

무덤날 책(Doomsday Book)이라고 이런 껄적지근한 제목은 작가가 새로이 명명한 어휘인줄 알았는데 책에서도 잠깐 잠깐 언급되기도 하듯이 실제로 존재했던 책의 이름이란다.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역사〗 1086년에 영국 왕 윌리엄 일세가 징세의 목적으로 작성한 두 권의 토지 대장. 토지의 보유자 이름, 장원의 이름과 규모, 농민의 수, 방앗간, 양어장, 문화 시설의 수 따위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책인데, 작가가 새로 만든 어휘가 맞네. 스펠이 다르구나.
Doom [숙명, 불운, 파멸, 죽음 ] - Dome [둥근 천장, 둥근 마루터기].
그런데 우리 내 정서로 보면 두 단어가 별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의 무덤이 어떠한가. 바로 커다란 밥공기를 뒤엎어 놓은 듯 둥글지 아니한가. 그리고 무덤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거지. 살아서 무덤에 묻히는 사람은 없잖아.

자, 되지도 않는 해석은 그만 두고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의 세계로 빠저 봅시다. 2054년. 책에서는 그 때즈음 되면 시간여행이 가능해서 과거의 어느 장소와 어떤 시간대로 뽕! 하고 전이가 가능해진단다. 솔직히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개말마에서도 이리 저리 잘도 옮겨 다녔더라.

물론 시간이나 위치의 편차라던가 전이해간 곳에서 복귀할 때는 원래 그곳에 있던 것은 어느 것이라도(심지어 바이러스일지라도) 넘어 오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시공을 초월하는데 이정도 한계쯤이야.

이렇듯 놀랄만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해서 역사학과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거지만, 주인공인 키브린(울림이 좋아)도 중세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흑사병이 만연하기전의 영국으로 갈 준비를 착실히 마친다. 던워디 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분별 있는 어른이 말리면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고, 아무리 노인네의 기우라고 치부하려 해봤자 젊은이의 치기로는 어찌해볼수도 없는 게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이다.

하지만 자식 말리는 부모 없다고 여차여차해서 키브린은 1320년으로 가게 됬지만, 그때가 그때인지 거기가 거기인지도 불확실한 상황에다 전이 엔지니어를 시적으로 현재(2054년)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질환으로 픽픽 쓰러져 나가고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던 키브린도 갑작스런 통증 번역기의 고장 등으로 고생을 면치 못한다.

점점 책에 빠져들어 가면서 정말 던워디 교수의 생각처럼 '설마 1348년은 아니겠지'하는 마음이 전해질 정도로 긴박하고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되간다. 물론 나도 던워디 교수도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지만…….

2054년의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고 1348년의 일들도 변변찮은 과거의 기록들이나 유물들이 아니면 그 당시가 어떠했는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코니 윌리스는 흡사 중세에 가 있는 듯한 것처럼(아니 거긴 중세야)상황을 묘사해 나간다.

2054년은 어쩠냐고.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2054년은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고 무선전화는 없고 통신 회선이 용량 과다로 마비되어 불통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전여 개연성이 없거나 허무맹랑한 세계로 표현 되는 것도 아니지만, 책에서의 2054년도 충분히 있음직한 미래다(오웰의 1984년처럼).

지척지척 대는 바깥 상황과 더불어 머릿속을 지근지근 대던, 아니 오히려 책에 더욱 깊게 몰입할 수 있게 해준 OASIS의 신보도 책의 감상에 한 몫 했다. 갤러거 형제들도 영국인이지 않은가. 옥스퍼드! 맨체스터!

OASIS
데뷔앨범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렬함과 그에 상응하는 폭발적인 반응. 바로 다음 앨범에서 정상에 오른 그들이었기에 이후의 모습들(음악이든 음악 외적이든)이 팬들이나 평단 양쪽에서도 그리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진 못했다. 심지어 사기꾼으로 매도당하는데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되었건 간에 책을 읽는 내내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DON'T BELIEVE THE TRUTH]는 충분한 준비와 엄정한 검사 속에서도 1348년으로 가버린 키브린을 비웃기라도 하듯 "She believes in everything." 부정하고 싶어도 거기 있는 현실은 1348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1348년임을 받아들이고 믿었기에, OASIS가 더 이상 사기꾼이 아니듯이(내게 있어 한번도 사기꾼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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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술에 취해...

끄적끄적 2005/04/16 22:59
세상에는 하나 하나 사람 마다의 삶의 방식이 있고 살아온 과정이 있다.

번듯한 집안에서 금과옥조 보살핌을 받고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 속에서 오기와 끈기만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정작 자기가, 주변이나 환경과는 달리 자기 자신이 얼마나, 혹은 어떻게 해 나가가고자 하는게 아닌가 싶다.

너무 술에 취해 감상적이거나 이상적인 범주 위에서 얘기 하니냐 싶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렇다고 얘기 할 수도 없겠다.

짦은 군 생활이지만 그닥 생겨먹은게 좋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군에 몸담지는 못하고 병역 특례 생활을 하곤 있지만, 각자의 생활에도 장단점이 있으므로(최근 제대한 친구를 보면,정말 남자라면 군대란건 꼭 겪어 봐야 하는 것이로구나 느낄 정도로) 어느게 더 낫다고 꼭 찝어 말 할순 없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에대해 충실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생활에 만족해야겠다.

이런 전제 하에 오늘의 술자릴 평가 하자면(거창하게 평가랄 것은 없고) 자기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깨닫더라도 고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런 점들은 이미 남들이 보거나 느끼기에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말이 이상한데 정리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약점은 남이 보기에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빈틈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평가해 보라고 하면 누구든지 현 상황보다 더 나은 점수를 주기 마련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의 현실이다.

하지만 언제나 비관적이고 냉정하며, 세상에 부정적인 나로서는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별다른 이유없이, 아무리 내가 잘난게 있더라도 비하하고 폄하하는 성격 탓으로 우울한 상황을 자초하므로 별로 특이할 만한 것은 아니다.

각설하고,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약점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은 이미 남들이 보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알콜의 힘을 빌어 말을 꺼냈듯이, 남들은 나보다 정확하고 솔직하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말하길 꺼려하지 않는다.

술자리니까. 흥청망청 마시고 웃고 떠들고 난 뒤면 모두 잊어버리겠지. 아니면 그때 얘길 꺼내는 녀석은 속 좁은 녀석으로 치부해 버리면 되니까. 취해서 얘기한건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소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그렇듯이...

인생의 전환점이라든지 유식한 말로 터닝 포인트라든가 하는 것은 깨닫고 나면 하찮은 것이지만, 잡다한 혹은 거창한 말로 포장되어진 이 인생을 끝내기 전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내게 득이 되었나, 해가 될 것이냐.

아직 그것을 판단하기엔 너무 어릴 뿐더러, 미천하고 어리숙하다.

하기사 부모님 생일도 모르는 녀석 위의 푸념이란 말 할것도 없지 않은가.

인생은 짧다.

원해서 하는 일이든 아니든,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겨라.

내일은 그리 먼 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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